• 최종편집 2019-10-1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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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WHC-AP 동아리 몽골 세계유산 탐방기
          동아리 대표학생 화순이양고 2년 김보아참여 학생-화순고 2년 나진석, 1년 김한결, 김지성, 조우석, 하영민, 이명룡맨토교사 화순고등학교 진로진학상담교사 윤학근 우리는 OWHC-AP 세계유산 도시기구 동아리로 첫 시작을 했다. 우선 OWHC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세계유산은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이를 후손에게 전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가 있으므로 이를 위하여 세계유산 도시기구가 창립되었으며, 회원도시들의 문제에 관해서 논의의 장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활동을 하며 많은 부족함과 한계에 부딪혀왔다. 학생이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학생이기에 시간적인 여유로. 이러던 와중에 전라남도 교육청에서 주관한 이 프로젝트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의 포기와 실패를 도전과 성공으로 마주하기 위해 우리 앞에 기적같이 찾아왔다. 하지만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첫 단계는 면접을 통한 우리의 포부를 밝히는 것 이었다. 3가지의 질문만으로 우리의 모든 것과 우리들의 다짐들을 다 보여주기는 어려웠지만 다른 큰 문제없이 1차 면접 심사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1차 심사를 마치고 이제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여행을 위한 도전이 아니라 도전을 위한 도전인 것이다’ 생각 하며 머릿속에 매번 되새겼다. 이번 과제는 8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고 그 안에 우리의 계획을 비롯한 모든 것을 드러내야만 했다. 주말에 모이고 방과 후 수업이 끝난 후에도 모여 회의를 하고 도전을 외쳤다. SNS를 통해 실재 몽골인들과 소통을 하며 몽골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서 배웠으며, 많은 여행사와 투어 가이드를 찾으며 합리적인 가격과, 예산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인터넷 조사와 심지어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TV 프로그램까지 같이 찾아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저절로 가까워졌고 가족이 되었다.면접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불안과 부담은 날로 증대했고, 드디어 면접 날이 왔다. 모든 팀원이 일심동체로 파이팅을 외쳤고 브리핑실에 들어간 우리는 모두 낙담과 한숨을 뱉으며 브리핑실을 나왔다. 끝나고 나서는 왜 이렇게 아쉬움만 남는 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림밖에 없었다. 드디어 발표 날이 다가왔고 기적처럼 성공이 우리에게 안겼다. 우리 팀은 다른 팀과는 달리 국내형 프로젝트를 더해 제주도로 세계유산탐방을 다녀왔다. 아무래도 몽골이란 국가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더욱 철저히 아는 것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아리 이름에 걸맞게 성산일출봉, 만장굴, 한라산백록담의 세계유산과 제주 항몽유적지를 방문했다. 항몽유적지 답사를 통해 고려시대의 삼별초가 토벌되기까지의 거점으로 한국과 몽골의 역사적인 관계를 잘 알 수 있었다. 제주 탐방을 마친 우리는 차근차근 몽골을 재조사하며 준비를 시작했다. 도전일이 다가왔고, 7월 17일부터 7월 26일까지(9박10일) 우리는 몽골의 세계유산 차강 살라 암각화, 포타니 빙하, 호이트 쳉헤르 동굴, 테를지 국립공원 네 곳의 세계유산과  칭기스칸 박물관, 말 동상, 바얀을기 제5번 학교, 국영 백화점, 자연 박물관 등을 탐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2019년 7월 17일 새벽 5시 30분, 설레는 마음으로 무안 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다들 피곤했는지 차에서 잠이 든 우리는 7시 무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호화로운 여행이 아닌 지금까지 성장 배경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과 마주하고픈 마음을 머릿속에 그리며 10시 30분, 몽골 울란바토르에 위치한 칭기스칸(Чингис Khан) 공항 행 비행기를 탑승했다.14시 30분, 몽골에서 가장 큰 칭기스칸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몽골에서 다른 소도시의 공항과는 달리, 이곳은 도시의 명칭 대신 몽골 역사에서 가장 큰 전성기를 누린 왕, 바로 칭기스칸을 기념하기 위해 칭기스칸 국제공항이라 등록되었다고 한다.17시 30분, 몽골의 시내 모습을 구경하며 테를지 국립공원(Terelj үндэсний цэцэрлэгт хүрээлэн)에 도착했다. 테를지 국립공원 입구에는 우리나라의 돌탑과 비슷하지만 훨씬 큰 ‘어워’라고 불리는 무속신앙 품이 있었다. ‘어워’는 길이 험난한 몽골에서 만든 풍습과 같은 것으로 무사히 도착함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고, 앞으로의 여정 또한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신앙적으로 자리 잡혔다. 우리 또한 ‘어워’주변을 세 바퀴 돌며 돌멩이 3개를 ‘어워’에 던졌다. 테를지 국립공원은 1년 내내 개방하는 국립공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과 기암괴석, 숲, 초원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18시, 테를지 국립공원 내부 승마 체험장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우리 또래의 학생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만 보던 멋진 카우보이들 같았다. 몽골은  대부분의 관광객들을 위한 승마교육이 아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몽골의 국가 행사인 나담축제 역시 성인 어른의 말 경주가 아니라 더 가벼워 빨리 달리기 위한 목적으로 아이들의 말 경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광활한 초원에서 승마는 마치 세상에 우리만이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불러왔다. 우린 국적과 성장배경 모두 달랐지만, 눈과 마음으로 소통하며 첫 몽골인과의 교류는 성공적이었으며, 한 시간 동안의 승마가 10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20시, 테를지 국립공원에 위치한 게르 캠프에 도착하였다. 게르는 나무로 만든 뼈대에 가축의 털로 짠 두꺼운 천이나 가죽을 씌운 몽골의 전통 가옥이다. 유목 생활을 해온 몽골의 초원 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가옥 구조가 단순하여 쉽게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어 이동 생활이 편리한 게르에서 생활해왔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게르에서 생활하고 있다. 우리 역시 몽골의 전통가옥, 게르에서 하루를 보냈다. 게르 내부는 우리의 걱정보다 따뜻하고 쾌적했다.20시 30분, 저녁 식사로는 게르 캠프에서 준비한 특식 허르헉 [Khorkhog (양고기)]를 먹었다. 허르헉은 달궈진 돌로 양고기를 당근과 감자 등 야채와 함께 찌는 요리이다. 원래 몽골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었으나, 현대로 들어서며 몽골 사람들에게도 어느 순간 특식이 되었다고 한다. 7월 18일 기상 후 10시 30분, 우리는 뒷산을 산책했다.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곳에는 에델바이스, 서양채꽃, 패랭이, 노란색의 꽃양귀비 등 수 많은 종류의 야생화가 만발하고 있었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다음 장소 또한 큰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12시 30분, 점심식사로는 닭고기 스테이크(Тахианы махан стейк)를 먹었다. 산책으로 허기진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해치웠다.13시 30분, 몽골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인, 거북이바위를 관람했다. 옛날 몽골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몽골의 왕이 그 바위 밑에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남아있다고 한다. 14시 30분, 몽골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칭기스칸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과 박물관을 관람했다. 이 동상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말 동상으로, 칭기스칸의 가장 좋은 친구인 버르치와 함께 놀던 중 채찍을 주운 장소라고 한다. 몽골에서 채찍을 줍는다는 것은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징조로, 칭기스칸과 버르치 역시, 미래 우리의 일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칭기스칸 기마 동상은 고향 쪽을 향하고 있으며 마주보는 저 멀리에는 칭기스칸의 어머니 동상이 보인다. 7월 19일 4시 20분, 바얀울기 아이막의 아랄톨고이, 차강골 위쪽 계곡, 차강살라 암각화등 세계유산 답사를 위해 우리는 한 번 더 칭기스칸(Чингиc Xaан)공항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바얀울기 공항으로 이동했다.6시 20분, 바얀울기 공항에 도착했다. 이쪽은 북쪽으로 많이 치우쳐있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거센 바람이 우리를 반겼다.마중 나온 베이스캠프의 스테프 직원 2명과 2대의 러시아산 푸르공 이라는 승합차를 타고 7시 20분, 캠프에 도착하였다.8시, 캠프에서 조식으로 ‘반시태 슐’ 이라는 한국에서 찐만두국과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 걱정과는 달리 음식이 우리 입에 잘 맞았다. 12시 30분, 차를 타고 세계유산 알타이 암각화(차강 살라 암각화)를 답사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 점심식사를 위해 물가 근처에 정차했다. 이후 우리는 의자와 식탁을 조립하고 음식을 기다렸다. 점심은 잘게 썬 밀가루 반죽과 다진 고기가 들어간 볶음면 이었다. 18시 40분, 암각화를 보고난 후, 실제 유목민이 사는 게르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매우 추운지역이라 여름에도 난로를 피워야한다. 하지만 땔감을 많이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말린 야크의 대변을 연료로 사용한다. 또한, 몽골에서는 말의 젖을 많이 먹기 때문에 밖에서는 마유를 말리고, 집안에서는 수태차를 끓인다. 우리에겐 수태차 냄새가 친숙하지 않아 게르안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힘들었다.14시 30분, 암각화 탐방(차강살라 암각화Саган Сала Петроглиф)을 위해서 차만 8시간 타고 달렸다. 끝내 우리는 차강살라 암각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옛날 몽골인들이 목축과 사냥의 기원을 위해 여러 가지 동물들의 그림을 새겨놓았다. 우리나라도 옛 사람들이 농사와 사냥의 풍요를 위해 여러 가지 동물들의 그림을 새겨놓았다는 점에서 정말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알타이 산맥은 몽골과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하는 고지대 오지이다. 요즘 들어 이곳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하나로 학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특히 몽골 알타이의 암각화들이 시대성과 다양성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일단 정보에 의존해 찾아 나서기는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길다운 길이 없고, 안내판 하나가 없었으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막성 지형물들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초원과 사막을 지나고 산을 넘어 만나는 암각화들은 그야말로 보물찾기였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는 그것들은 보석처럼 다가왔다. 염소와 양, 사슴, 소, 그리고 사람 등등이 그려져 있는 암각화는 마치 현대인들의 회화를 보는 듯했다. 수천년 전의 목동들에 의해 그려졌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히 느껴졌으며, 주로 산 아래쪽 어두운 색깔의 편평한 돌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 바위들에 틈이 생겨 우리나라 제주도에 있는 주상절리와 같은 기둥모양으로, 기울어진 절리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암각화는 1만 2000년 전쯤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 까마득한 시절의 그들은 바로 암각화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평지에 고대 묘지군이 있는데 ‘키릭수르’라 말하는 수십개의 돌무지와 ‘쿠누 초도’라 말하는 사람 모양의 돌비석이 서 있는 곳이다. ‘쿠누 초도’는 마치 우리 고장 전남 화순 운주사의 석인상과 아주 흡사하다. 운주사의 석인상을 검색하면 ‘쿠누 초도’가 나올 만큼 매우 흡사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암각화들이지만 안내판은 물론이고 홍보와 정보 제공의 수단, 특별 보호장치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이 점은 OWHC-AP세계유산 도시 기구 동아리 활동을 하며 의논할 계획에 있다. 아마 암각화 표면에 코팅 처리한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래서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일까. 어쩌면 수천년의 세월을 이렇게 지내왔듯이, 알타이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이렇게 자연스레 굴러가는 것일지도 모른다.7월 20일 9시 30분, 조식으로는 빙(Bing)이라는 튀긴 밀가루 반죽을 먹었다. 가이드 분들이 큰 천막을 쳐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바삭바삭하게 잘 튀겨서 식감을 높여 주었다.13시, 포타니 빙하(Портани мөсөн гол)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날씨가 좋아 빙하가 선명하게 보였다. 운전기사분도 이렇게 선명히 잘 보인적은 없다며 우리가 운이 매우 좋다고 하셨다.14시 40분, 포타니 빙하(Портани мөсөн гол)에 도착하였다. 날씨상황이 갑작스럽게 좋지 않아져 사진만 찍고 내려가야만 했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뒤에 만년설이 가까이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다. 더 있고 싶었지만 날씨가 안 좋아서 더 있다간 내려가기 힘들 수도 있다는 말에 서둘러 차를 타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7월 21일 아침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걸쭉하고 달달한 수프인 ‘킷츠라이스’를 먹었다. 다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하며 게르에서 함께 지냈던 정이 든 유목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사진을 같이 찍고, 점심식사도 했다. 한국에서 챙겨간 사탕과 볼펜 등 작은 선물을 나누어 주고, 게르에서 간단히 수테차를 함께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5시간을 달려 암각화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자연환경을 감상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 하며 매순간 감탄을 자아냈다. 암각화에 도착하여 수천 년이 지나도 뚜렷한 암각화의 형상을 보며 지워지지 않은 암각화가 신기하기도 하였고,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가축의 종류를 통해 현재의 몽골보다 더 춥고 건조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차강살라 암각화보다 더 다양한 형태의 암각화를 볼 수 있었다. 보존보다는 개방의 형태로, 관광객들이 바위위에 또 다른 그림들을 새기는 등 보존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점은 몽골의 세계유산을 지키기 위한 필요점으로 보인다.암각화를 감상한 후, 물가 근처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낼 준비를 했다.저녁에는 가이드님, 기사님들과 함께 캠프파이어를 했다. 해가 지고, 캠프파이어를 하는 중 하늘을 보니 별이 우리에게 쏟아질것만 같았다. 책에서만 보던 북두칠성이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선명히 있었고, 그 옆에는 카시오페이아자리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린 아름다운 은하수와 별에 취해 춤도 추고, 음악도 들으며, 의미 있게 하루를 마무리 했다.   7월 22일 아침에 일어나 우리가 잤던 텐트를 우리가 개고 이동할 준비를 한 후 맛있는 밥을 먹고 울기 게르로 이동을 하였다. 이동을 하던 도중 몽골에 대한 애국심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듯한 게르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있었다. 엄청나게 거대하고 무거워 보이는 독수리가 발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도 잠시 독수리를 팔위에 올리고 사진을 찍는다는 소리를 듣고는 겁이 나기도 했다. 독수리를 우리의 팔위에 놓고 사진을 찍으니 팔이 많이 무거웠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한 후 저녁을 먹었다. 밀가루와 고기, 당근, 감자를곁들인 음식으로 비시파르마흐를 먹었다. 맛이 독특했다.저녁을 먹은 후, 몽골 전통악기를 가지고 공연을 해주시는 분이 찾아왔다. 우리를 위해 베이스 캠프 사장님께서 준비해주신 것이었다. 노래도 불러주시고, 러시아, 영어, 몽골어로 된 노래들을 불러주시니 뜻깊었다. 7월 23일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우리의 운전기사 분들이 학교 선생님들이어서 학교를 방문했다. 학교는 초,중,고 모두 같이 다니는 학교인데 매우 작아보였지만, 학생 수는 2000명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다닌다. 학교가 우리나라와 많이 달라서 영화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학교를 방문한 뒤 점심을 먹고 박물관을 갔다. 박물관에서 몽골의 동물들과 생활양식들을 볼 수 있었다. 4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이었는데 층별로 역사, 동물, 전통문화, 전통의상이 있었다. 몽골에 대해 한층 더 이해할 수 있었다.기사님들이 몽골 친구들을 불러주셨다. 몽골 친구들이 약 8명 정도 왔는데 운동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몽골 또래들과 두 번째 교류였는데 평생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피자도 같이 먹으러 갔는데 몽골 피자가 처음이었지만 지금까지 먹은 몽골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음식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7월 24일 10시, 깔끔한 현대식 숙소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고 몽골 전통 악사들이 즐겁게 우리를 맞이해준 울기 유목민 숙소에서 떠난다니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계속 들었다. 또한 울기 일정동안 동행하며 우리 팀의 밥을 책임져 주시는 두 분과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포옹을 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다음 일정인 홉드로 출발하였다.6시, 거친 초원의 몽골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울란바토르행 비행기가 있는 홉드 숙소에 도착하였다. 홉드로 오늘 길에 몽골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산들도 보고 주변에 많은 호수들을 보면서 왔다. 호수인데 바다처럼 크기도 하지만 파도도 쳤다. 또한 검은색으로 된 호수도 있었다. 홉스에 숙소는 다른 게르와 달리 냄새도 나지 않고 주변에 암석으로 된 산들이 있어서 위엄한 자연환경 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8시, 가지고 있던 모든 한국 반찬과 몽골 음식을 푸짐하게 먹었다. 밥이 더 없어서 아쉬울 정도였다. 한국 반찬을 몽골 가이드 분들과 나누어 먹는 행복한 저녁식사였다. 저녁을 먹은 후, 가이드 및 기사님 송별회를 시작했다. 이곳 울기-홉드일정의 마지막 밤이었다. 때문에 이번 울기 일정의 이동을 책임져 주시는 기사님들과도 마지막 밤이었다. 거칠고 험하고 힘든 길을 직접 운전하시면서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기사님들을 위해 우리가 간단히 음료와 간식을 대접하면서 송별회를 준비했다. 이번 밤이 마지막이라서 씁쓸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좋은 만남은 좋은 이별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있는 노래방 기기를 이용하여 서로 노래를 부르며 다 같이 춤추며 즐거운 송별회를 보냈다. 이번 송별회로 언어의 장벽이 있더라도 서로 진실한 마음만 있으면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7월 25일 9시, 상쾌한 공기를 맡으며 일어났다. 게르 문 밖을 나가보면 그곳에서 유목하는 소, 양들 등 다양한 가축들과 그 뒤에 펼쳐진 아름다운 산들이 펼쳐졌다. 숙소에 있는 샤워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조식을 먹고 근처에 있는 고르왕 셍헤르 아고이 동굴로 출발할 준비를 하였다.11시, 호이트 쳉헤르 동굴 및 암각화 관람했다. 고르왕 셍헤르 아고이 동굴은 몇 만 년 전  몽골인들이 안에서 생활한 동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굴 안에는 2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까지 수 만년전의 생활모습과 그 시대의 생물까지 알 수 있는 암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동굴은 러시아의 지질학자가 발견하였고, 동굴안의 송아지가 부근 50km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오른쪽으로 연결되어있는 굴이 50km이상 이어져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안에는 많은 먼지와 새똥으로 가득해서 걸을 때마다 숨을 쉬기 힘들었지만. 동굴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낙타. 나무, 사람의 암각화와 말 발자국 등 다양한 흔적이 있었다. 동굴 등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그곳에 사는 몽골인들의 지혜를 엿 볼 수 있었다.3시, 숙소에서 홉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가면서 호수를 보았는데 주변에는 게르등 다양한 숙박 시설이 있었다. 그곳에서 사진도 찍고 물수제비도 하며 잠시 쉬었다. 또 한국어를 할 줄 아시는 몽골 분을 만났는데, 지금까지 몽골이란 나라 속에 다양한 한국 문화들이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이 정말 자랑스러웠다.4시, 비행기를 타기 전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 홉드 시내에 있는 호텔에 들려 피자를 먹었다. 그곳에서도 미국 관광객들을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몽골에 와서 몽골인 뿐 만 아니라 다양한 외국 관광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 거 같아 뜻깊은 경험이었다.하지만 그 때 울란바트의 기상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비행기가 지연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는 12시간이나 지연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남은 시간 동안 홉드 시내를 관광하기로 하였다.홉드는 울기보다 큰 도시라고 가이드 선생님이 말씀 해 주셨다. 광장, 주택가 등 다양한 홉드 시내를 차로 둘러보다가 비행기가 또 지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일행은 홉드 안에 있는 호텔로 떠났다. 생각보다 호텔은 그리 좋지 않은 시설 이였지만 우리 일행을 배려해 주신 가이드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호텔에서 나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일본의 다이소 등 다른 여러 나라의 가게들도 많이 보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보았다. 또한 이곳에서 조깅하는 뉴질랜드에서 온 관광객들을 만났는데, 초면인데도 영어로 몽골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7월 26일  1시 10분, 12시간이나 지연이 된 비행기를 타러 갔다. 타기 전에는 계속 지연되어서 결국 못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다행히 새벽이라도 비행기를 탈 수 있어서 안심되었다. 전날 밤이 기사님들과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했지만 비행기 지연으로 이번 밤까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일정이 끝났는데도 끝까지 우리 일행과 같이 이동해 주신 기사님들의 책임감 때문에 한 번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비행기 탈 때 쯤 기사님들과 마지막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인사하고 소정의 선물도 드렸다. 또한 팀 원 중 한명이 태극기를 건네줄 때 기사님이 ‘I love korea’라고 말씀 해 주셨는데 그 때 정말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새벽 4시 울란바트에 도착하여 늦은 새벽이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에서 숙면을 취했다. 몽골의 좌측 끝에 있는 울기-홉드라는 곳에서 보낸 일정이 끝이라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한국으로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마음 때문에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8시, 부족한 숙면 때문에 피곤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서양식 호텔 조식을 먹고 다음 일정을 준비하였다.9시, 국영백화점을 가는 길에 잠시 울란바토르 시내 투어도 하였다.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오래전에 건설된 다리도 보고, 러시아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다양한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러시아식 건물들 때문에 유럽에 온 듯한 느낌도 받았다.10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국영백화점에 갔다. 국영백화점은 1924년 세워진 몽골의 가장 큰 백화점이다. 5층 건물로 식재료, 몽골 기념품, 의류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11시 30분. 캐시미어 공장에 갔다. 몽골은 인구 수 보다 가축의 수가 배로 많아, 캐시미어가 굉장히 알려져 있다. 몽골의 특징을 이용한 캐시미어 사업은 개인 뿐 아니라 국가적인 측면으로도 다양한 이점을 가져올 것 같았다.12시 30분, 모든 몽골 일정을 끝내고 대한민국행 비행기를 타러 칭기스칸 공항에 도착하였다. 9박10일의 일정을 함께 해 주시고 우리 팀원들을 위해서 배려해 주시고 책임감 있게 이번 일정을 잘 마치게 도와주신 가이드 선생님과도 아쉬운 작별인사를 건네고 우리 팀원들은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번 미래도전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몽골의 위대한 자연환경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도전을 하게 한 여정이었다. 단순히 즐겁고 편안한 여정이 아닌 음식이나 씻는 문제 등 불편하고 힘든 경험을 통해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는 도전의 기회를 만든 것 같았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점이나 감사함, 도전 정신 등 얻어가는 점이 정말 많았던 것 같다. 1시 30분, 한국에 도착하였다. 입국 절차를 따르고 청주에서 광주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유성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했다. 처음에는 이곳이 한국인가 하는 의구심도 약간씩 들었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말소리, 간판 등을 보며 한국에 드디어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조한 몽골 날씨와는 다르게 한국은 장마철이여서 덥고 습한 날씨였다. 때문에 몸의 찝찝한 느낌 때문에 피곤함이 배가 되는 것 같았다. 6시 10분, 입국 절차에서 공황 측 실수로 버스를 놓쳐 일정이 지연되었지만 곧 화순으로 간다는 마음에 마냥 힘들지는 않았다.7시 10분, 유성에 도착하고 광주로 가는 버스에 탑승 하였다. 2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팀원들과 화순에서 도착해서 할 활동을 간단히 얘기하고 지친 몸을 잠시 쉬었다.8시 30분, 드디어 익숙한 곳,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팀원들 가족 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번 프로젝트를 잘 완수할 수 있었던 점 중에 하나가 팀원들 가족들의 아낌없는 지원도 한 몫 했다고 생각했다.11시 30분, 드디어 우리가 여정을 출발한 화순에 도착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화순은 느낌이 새로웠다. 새벽 12시 30분, 간단하게 팀원들과 선생님, 팀원 가족 분들과 저녁식사를 하였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한식은 역시 맛있고 그리웠다. 또한 이번 도전을 완수한 소감을 팀원들끼리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 그동안 힘든 도전을 같이 잘 버티고 서로 도와준 든든한 팀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미래도전프로젝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 반성할 수 있었고, 몽골인 외에도 러시아인, 북한인, 캐나다인, 미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 같아 뜻깊은 경험이었다. 특히, 한국어를 구사하는 몽골분이 계셨는데 몽골이란 나라 안에서 여러 익숙한 한국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류의 열풍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암각화를 보면서는 수천 년이 지나도 뚜렷한 암각화의 형상을 보며 지워지지 않은 암각화가 신기하기도 하였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가축의 종류를 통해 현재의 몽골보다 더 춥고 건조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보존보다는 개방의 형태로, 관광객들이 바위위에 또 다른 그림들을 새기는 등 보존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점은 몽골의 세계유산을 지키기 위한 필요한 점으로 보인다.   청소년 미래도전 프로젝트란?학생 자발적으로 팀을 구성하여 원하는 활동을 기획하고 일정기간 실행ㆍ평가ㆍ성찰하는 과정을 거쳐 진로탐색 및 꿈에 대한 도전을 통해 미래역량을 기르는 전남형 학생중심 프로젝트 기사 작성자 전라남도청소년미래도전 GAD대표 화순이양고등학교 2학년 김보아  
    • 기획.연재
    2019-09-30
  • 정약용, 솔잎 먹어치우는 송충이 시를 짓다.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은 강진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내준 토담집 방 한 칸에서 지냈다. 1802년 초봄에 주막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아전의 자식들이 정약용에게 배우러 찾아왔다. 황상, 손병조 등 네 사람이었다. 다산은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도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1803년에 정약용은 주막의 토담집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었다. 「사의재기(四宜齋記)」를 읽어보자.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 때 거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단정히 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말이 많다면 빨리 그쳐야 한다 .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라고 하였다. 마땅하 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과 학업이 쇠퇴하여 가는 것이 슬퍼 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때는 가경(嘉慶) 8년 (1803, 순조 3) 겨울 12월 신축일 초열흘임.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 순조 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周易)》건괘(乾卦)를 읽었다.” 사진 1  동문 주막집  사진 2  사의재 편액 정약용은 1803년(순조3) 가을에  ‘애절양 (哀絶陽)’ 시를 지었다. 이어서 정약용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치우다 [蟲食松]’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소나무를 선량한 백성으로, 송충이를 탐관오리로 상정하고 읊은 우화시(寓話詩)이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그대 보지 않았던가아니 보았던가, 천관산 가득 메운 소나무를                                         君不見天冠山中滿山松천 그루 만 그루가 뭇 봉우리마다 다 뒤덮었네   千樹萬樹被衆峯울창하고 굳굳한 노송뿐만 아니라  豈惟老大鬱蒼勁어여쁜  어린 솔도 총총히 돋았는데  每憐穉小羅丰茸 천관산은 전남 장흥군에 있는 산이다. 장흥과 강진은 인접해 있다.   하룻밤 새 해충이 온 천지를 가득 메워      一夜沴蟲塞天地뭇 주둥이가 솔잎을 떡 먹듯 하였다네.      衆喙食松如餈饔 갓난 때도 살 빛 검어 볼썽사납더니         初生醜惡肌肉黑노란 털에 붉은 반점 자랄수록 흉측하네.     漸出金毛赤斑滋頑兇 처음에는 잎을 갉아먹어 진액을 말리더니     始????葉針竭津液살갗까지 파고들어 옹이가 되게 하지         轉齧膚革成瘡癰                                          가지하나 까닥 못하고 소나무 점점 말라붙어   松日枯槁不敢一枝動곧추서서 죽는 모습 어찌 그리 공손한가.      直立而死何其恭 연주창에 문둥병 걸린 가지 줄기 처량하니     瘰柯癩幹凄相向상쾌한 바람 울창한 숲을 어디 가서 찾으리오.  爽籟茂樾嗟何從 하늘이 솔을 낼 때 깊은 생각 있었기에         天之生松深心在사시사철 보살피고 한겨울에도 푸르지.         四時護育無大冬뭇 나무들 다 제치고 가장 높은 사랑받았는데   寵光隆渥出衆木복사꽃 · 오얏꽃과 화려함을 다툴손가.          況與桃李爭華穠 태실과 명당이 만약에 무너지면              太室明堂若傾圮들보되고 기둥되어  조정에 들어왔고         與作脩梁矗棟來朝宗 왜놈이나 유구가 만약에 덤벼올 때엔           漆齒流求若隳突큰 배를 만들어 적의 예봉 꺾었지            與作艨艟巨艦摧前鋒 소나무는 대들보로 쓰였고, 판옥선을 만드는 자재였다. 판옥선은 삼나무로 만든 왜선보다 튼튼했다.   한편 유구는 오키나와이다. 1879년에 일본은 유구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네 욕심만 채우느라 지금 이리 죽여 놨으니   汝今私慾恣殄瘁말하려니 내 기가 받쳐 오르네.               我欲言之氣上衝 어찌해야  번개 같은  벼락도끼를 얻어다가   安得雷公霹靂斧네 족속들 모조리 잡아 이글대는 용광로에다 처넣어버릴까                                            盡將汝族秉畀炎火洪鑪鎔 벼락 도끼로 찍어서 이글대는 용광로에 처넣고 싶은 것이 어찌 송충이 뿐일까? 선량한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탐관오리는 모 두  송충이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송충이들은 없나?     1803년에 정약용은  황칠(黃漆)시도 지었다. 이 시에서 정약용은 공납(貢納)의 폐해를 지적했다. 공납은 백성이 그 지방의 토산물 을 조정에 바치는 것인데 황칠도 공납 대상이었다. 시(詩)를 읽어보자.  그대 아니 보았던가. 궁복산(弓福山)에 가득한 황칠을  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 나지        껍질 벗기고 즙 받기를 옻칠 받듯 하는데    아름드리 나무애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궁복산이 어디인가? 강진 근처 어디 일 것이리라. 황칠나무는 해발 700m 이하의 전라도 · 제주도 해안지대에서 야생한다.   상자에 칠을 하면 붉고 푸른 색을 뺏어       잘 익은 치자물감 어찌 이와 견줄손가.       서예가의 경황지로는  더더욱 좋아서납지(蠟紙) 양각(羊角) 모두 그 앞에선 쪽도 못쓰네.    경황은 경황지(硬黃紙)를 말하는데 당지로 노란 물감을 들인 종이이다. 서예지로는 최고이다. 납지는 밀이나 백랍을 먹인 종이이 고, 양각은 양각등(羊角燈)으로 염소 뿔을 고와 얇고 투명한 껍질을 만들어서 씌운 등이다. 그런데 다산은 황칠은  납지, 양각보 다 단연 뛰어남을 강조한다.   황칠(黃漆)은 금빛을 띠면서도 투명해 나무 바탕의 나뭇결을 생생하게 나타내어 목칠공예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고려도경〉에는 황칠이 조공품이라고 적혀 있고, 〈계림유사〉에도 고려의 황칠이 섬에서 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나무 명성이 온 천하에 알려져서         박물지에 왕왕   그 이름을 올라있네           공물로 지정되어 해마다 공장에게 실려 가는데 징구하는 아전들 농간을  막을 길이  없어     지방민들 그 나무를 악목이라 이름하고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방납의 폐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지방 주민들이 황칠나무를 베었을까? 나무가 없어지면 공물로 바칠 이유도 없지 않는가.  지난 봄에 임금님이 공납 면제하였더니    영릉복유 되었다니 이 얼마나 상서인가     영릉복유(零陵復乳)는 당나라의 문장가 유종원(773∽819)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영릉(零陵)에 서 생산되는 석종유(石鍾乳)를 공물로 바치는데, 그것을 채취하기가 너무 힘이 들고 게다가 정당한 보상도 없어 지방민들이 석종 유가 다 없어졌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최민이 자사(刺史)로 와서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은 감복하여 석종유가 다시 생겨났다고 보 고하였단다. 바람 불어 비가 오니 죽은 등걸 싹이 돋고    가지가지 죽죽 뻗어 푸르름이  어울리네.     공납의 폐해를 없애니 황칠 나무가 잘 자란다. 민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정부가 규제하거나 간섭하면  민생은 위축된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19-09-30
  • 부패(腐敗)는 망국(亡國)의 길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 영국 수상 글래드 스톤 (1809∽1898)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지은 지 100년도 못되어 조선은 망했다. 부패한 조정은 백성을 가렴주구 했고, 학정에 못 견딘  동 학농민들은 1894년에 봉기했다. 하지만 고종과 민왕후는 반성은 커녕 외세를 끌어 들여 진압하려 했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조선 이 망한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이 주된 요인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위정자의 부패도 한 몫 했다. 부패는 망국을 자초한다.  -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 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 지 아니한가? (중략) 심서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 순조 21년(1821) 늦봄에 열수 정약용은 쓴다.1800년 6월 28일에 개혁군주 정조(1752∽1800)가 붕어하자 정약용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정약용은 남양주 생가에 내려가 서   서실 이름을 여유당(與猶堂)이라 하였다. “내가 노자(老子)의 말을 보건대, “여[與]여 !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유[猶]여 !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고 하였으니, 아, 이 두 마디 말이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사진 1 여유당 (남양주시 정약용 생가) 정약용은 겨울 내를 건너듯이, 사방의 이웃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매사를 조심했다.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11세로 즉위한 순조 대신 수렴청정(垂簾聽政)한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1801년 1월10일에 사학(邪學, 천주교) 엄금을 하교하여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사실은 집권세력 노론 벽파의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이었다. 2월8일 새벽에 정약용은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19일 만에 풀려나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귀양 갔다. 그런데 9월15일 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또 터졌다. 황사영은 큰 형 정약현의 사위였다. 정약용은 다시 끌려 왔다. 혐의가 없어 목숨은 건졌지 만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에게 거처를 내 줄 이가 없었다. 고맙게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토담집 방 한 칸 을 내주었다. 1802년 초봄에 정약용은 아전 자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황상, 손병조 등 네 사람이었다. 1803년(순조3) 가을에  정약용은 한 농민의 슬픈 사연을 듣고 ‘애절양 (哀絶陽)’ 시를 지었다. ‘남자의 거시기가 잘림을 슬퍼 하는 시’의 사연은 갈대밭 마을에 사는 한 백성이 낳은 남자아이가  사흘 밖에 안 되었는데 군적(軍籍)에 들어가고 아전이 못 바 친 군포(軍布)대신 소를 빼앗아갔다. 화가 난 백성은 칼을 뽑아 양경(陽莖: 성기)을 스스로 자르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런 곤욕을 당한다.” 라고 하였다 . 그 아내가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진 양경을 가지고 관청에 가서 울며 호소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다음은   ‘애절양(哀絶陽)’ 시이다. 갈밭 마을 젊은 아낙네 곡소리 길기도 해   곡소리 동헌을 향해 하늘에 울부짖네.      싸우러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못하는 것은 있었으나                               옛날부터 남자의 양기를 잘랐다는 말은 못 들었네.                                        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갓난애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조 · 부 · 자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네.    하소연 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가 관청에 지켜 섰고,                 이정(里正)은 호통 치며 소마저 끌고 갔네.    칼 갈아 들어간 방에 흘린 피 자리에 흥건하고 남편은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던 형벌도 억울한데   민(閩)의 거세 풍습은 참으로 비통했네.      옛날 중국 민(閩) 지방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환관을 시키려고 거세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 할 일인데, 하물 며 자기의 양경을 잘라서 군정(軍政)의 폐단에 대해 항의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식 낳고 살아가는 이치, 하늘이 주시는 일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지.   말이나 돼지 거세도 가엾다 말하거늘          하물며 우리 백성 자손 잇는 길임에랴.        부자들은 일 년 내내 풍악 울려 즐기지만   쌀 한 톨 삼베 한 치도 내놓는 일 없네.    너나 나나 똑같은 백성인데 어찌하여 후하고 박한가? 객창(客窓)에서 거듭거듭 시구편(鳲鳩篇)만 외우네. ‘시구편((鳲鳩篇)’은 『시경(詩經)』 ‘조풍(曺風)’에 나오는 시인데, 조나라 사람이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자를 뻐꾸기에 빗대 어, 뽕나무에 앉은 뻐꾸기가 새끼 일곱 마리에게 골고루 먹이를 먹여 기르는 것을 칭송하고 있다.  이 얼마나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는 시인가. 민중의 아픔을 읊은 사회시(社會詩)이다.   애절양 시는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 폐해의 극치이다. 황구첨정은 젖먹이 어린애까지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 軍布)를 징수하던 횡포이고, 백골징포는 죽은 사람도 군적(軍籍)에 올린 횡포였다.   16세에서 60세까지 남자 장정에게 부과된 군정의 경우도 양반은 면제되었다. 이런 불평등속에서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이 비일비재 했으니  백성들은 살 길이 없어 도망치고,  유민(流民)으로  전락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병전(兵典) 6조’ 제1조 첨정(簽丁 : 장정을 병적에 올리는 일)에서 군정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첨정하여 군포를 거두는 법은 양전(중종 때 인물)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폐단이 크고 넓어서 백성들의 뼈에 사 무치는 병폐가 되었다. 이 법을 고치지 아니하면 백성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순조 임금 시대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수령과 아전의 가렴주구는 극 에 달해 삼정(三政)이 더욱 문란해졌다. 부패가 풍습인 시대였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국민권익위원회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19-09-17
  • 김종식 시장 ‘독립운동가 후손’ 재조명
      낭만항구, 맛의 도시, 슬로시티, 근대역사도시 등 목포를 새롭게 브랜딩하고 있는 김종식 목포시장의 독립운동가 집안 내력이 알려져 새삼 관심을 받고 있다.김종식 시장은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조부님과 부모님 그리고 형제 친척들이 앞장서 왔다”고 말했다.실제로 김 시장의 조부 김경태 씨는 전국 3대 독립운동 성지인 완도군 소안도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 해 항일운동 30인중 한명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부친 김복도 씨는 농사를 지으며 반자유당 조직에 비밀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 시장의 형 김삼웅씨는 유신독재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었다. 또, 친일인명사전제작 부위원장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을 지냈고,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2004년 9월~2008년 3월)했다.김 시장의 5째 형 김종화씨도 전교조 광주 부지부장을 역임하며 교권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김종식 시장 본인은 대학시절 유신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었고, 전남도청에 재직할 때는 공무원 노동조합 설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며 전남도청 공무원 노동조합의 출범을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 기획.연재
    2019-08-05
  • “1천만 관광객 찾는 서남권 관광거점도시로 육성”
     9월 6일 해상케이블카 개통... 관광인프라 확충 기대 8월 8일 첫번째 ‘섬의 날’ 행사 통해 섬의 가치 제고‘목포(愛)가을(藝)페스티벌(樂)’ 문화예술 역량 특화   목포의 새로운 관광랜드마크가 될 해상케이블카가 오는 9월 6일 개통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고하도 해안힐링랜드와 목화정원, 스카이워크 등과 연계한 관광인프라 확충이 기대된다. 목포시는 자주적 근대도시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남도 맛의 본거지,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섬의 매력 등을 부각시켜 이전과는 다른 목포만의 새로운 슬로시티 모델을 만들어 나간다는 청사진을 내놓고 있다.맛의 도시 목포 완성을 위해 지역 모든 식당을 으뜸맛집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유도해 음식특화거리 조성, 경영 컨설팅, 식도락 관광상품 개발, 음식문화개선사업 등을 통해 맛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또 오는 8일 삼학도에서 열리는 첫 번째 ‘섬의 날’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 목포 지역 섬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는 복안이다. 외달도와 달리도를 전 세계 하나뿐인 바다자연정원으로 조성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작품 속에서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섬 예술랜드를 만든다는 야심찬 구상도 추진하고 있다.장좌도에 대규모 복합형 리조트 투자협약을 체결하는 한편 삼학도 어린이 복합테마공간, 해양레포츠 체험공간, 사계절 꽃피는 공간, 갓바위 문화타운 및 근대역사문화공간과 연계성 강화를 구체화하고 있다. 이밖에도 ‘목포(愛)가을(藝)페스티벌(樂)’을 개최하는 등 예향 목포의 수준높은 문화예술 역량을 특화상품화,  올 가을부터 9월과 10월에는 주말마다 다채로운 문화예술축제 행사로 관광객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민선 7기 들어 목포시의 제2 도약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김종식 시장을 만나 1000만 관광객 달성을 통한 서남권 관광거점도시로의 비전을 들었다.(편집자 주)   ■얼마 전 해상케이블카를 9월 6일 개통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차질없이 준비되고 있는지요?=총 연장 3.23km(해상 0.82, 육상 2.41)로 국내 최장, 왕복 40분 노선으로 현재 공정률은 98%, 승강장 및 주차장은 완료됐으며 메인로프 설치와 종합시운전 절차만 남아있습니다.8월초 외국기술진 책임시공하에 메인로프 설치가 완료되는 데로 시운전을 거쳐 개통하려고 합니다.지난 번 100% 안전보장을 위해 개통을 연기했듯이 무엇보다도 안전에 가장 큰 신경을 쏟고 있는 만큼 설치 및 운영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해상을 건너는 메인 타워 높이가 155m로 여느 케이블카에서 느끼지 못하는 스릴감을 선사하여 전남 서남권 대표 관광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보여 연간 130만 명 이상 방문, 1000억 원 가량의 경제효과가 예상됩니다. ■국제슬로시티 가입도 중요한 성과인데요?=우리시는 특정 지역, 특정 컨텐츠가 아닌 목포시 전체가 슬로시티로 지정돼 국내 16번째, 세계적으로는 253번째 국제슬로시티로 인정받았습니다.근대역사문화유산이 잘 보존된 원도심,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주민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는 외달도·달리도 등 목포가 보유한 우수한 자원과 가치, 정책, 더불어 살아가는 주민공동체 등이 호평 받았습니다. ‘슬로시티 목포’라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갖게 됨에 따라 목포 도시 브랜드 가치와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이에 따라 각종 마케팅과 홍보활동에 사용, 관광객 증가 및 지역경제 활성화와 주민 생활여건 개선 효과가 기대됩니다. 자주적 근대도시 역사성, 예향, 남도 맛의 본거지, 고유한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섬의 매력과 강점 등을 부각시켜 다른 곳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가장 한국적인 목포만의 새로운 슬로시티를 조성코자 합니다.특히 외달도와 달리도 바다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다자연정원으로 조성하고, 원도심은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해 연계한다는 방침입니다. ■맛의 도시 선언 이후 향후 계획은?=작년부터 목포가 남도를 대표하는 ‘맛의도시’ 브랜드 홍보를 지속적으로 하면서 그 일환으로 서울에서 ‘맛의 도시 선포식’을 진행했습니다.‘맛의도시’ 이미지에 걸맞은 음식관광 명소 조성 및 서비스 개선을 통해 관광객의 재방문률 제고를 꾀하는 한편 자연 발생적으로 먹거리촌이 형성된 곳을 중심으로 음식특화거리   환경 조성(포토존이 되는 조형물, 관광 편의 시설 조성), 외식업소 경영 개선 컨설팅, 으뜸맛집 지속 발굴 및 관리 등 통해 접객 서비스 향상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외식업소와 청년의 참여를 통해 다양한 고객층을 고려한 메뉴 개발 및 보급화에 노력하고 근대역사문화 및 다양한 관광지, 문화·예술 행사 등 다양한 콘텐츠를 음식과 함께하는 여행으로 상품화하여 음식관광 활성화로 지역 경제에 기여하겠습니다.향후 세계적인 맛의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시켜 내고자 합니다. ■목포시가 올 하반기에 큰 행사들을 많이 유치한 것으로 압니다. 관광활성화의 마중물이 될 만한 사업들인데 어떤 행사들이 열리는지요?=우선 8월 8일 개최되는 ‘제1회 섬의 날’ 기념행사를 다도해의 관문인 목포에서 개최, 8월 10일까지 3일간에 걸쳐 삼학도 일원에서 흥겨운 축제의 장 펼쳐집니다.‘만남이 있는 섬, 미래를 여는 섬’을 주제로, 온 국민이 다 같이 즐기는 축제 형태로 구성해서 행사 이름도 ‘제 1회 섬의 날 기념, 대한민국 썸 페스티벌’로 정했습니다.무엇보다 여름 휴가철과 방학이 겹치면서 전국에서 많은 관람객이 찾아올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2019년 전라남도혁신박람회를 유치, 9월 6일부터 8일까지 근대역사문화공간 일대 빈집과 빈상가를 홍보부스로 활용하는 혁신적인 박람회로 개최합니다.박람회 이후 빈집을 청년창업, 주민책방 등 지역주민에게는 활기를 주고, 관광객들에게는 또다른 볼거리와 휴식처가 되는 공간으로 만들어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기회가 되도록 잘 활용할 계획입니다.또 3일부터 11일까지 ‘2019 동아시아축구연맹 15세 이하 여자 축구대회’가 목포국제축구센터에서 열리고 있으며 8월 10~11일  국제파워보트대회가 평화광장 일원에서 열립니다.아울러 문화재 야행, 세계마당페스티벌, 항구축제, 버스킹 공연 등 가을철에 열리는 문화예술축제를 통합 브랜드화해 매주 주말에는 목포가 들썩들썩하고, 관광객들이 즐거움을 만끽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9월부터 10월까지 문화예술축제를 통합 브랜드화해 개최한다고 하셨는데=목포는 전국 최초로 예향이라는 명칭을 쓴 도시답게 문화예술 역량도 뛰어나고, 다채로운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고 있으나 개별적으로 진행되다보니, 마케팅에도 한계가 있고, 짜임새가 부족해 가지고 있는 역량이나 수준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그동안 개별적으로 개최되어 온 목포항구축제, 문화재 야행, 세계마당페스티벌 등 목포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축제뿐만 아니라 산발적으로 개최되던 각종 공연, 마을단위 축제를 하나의 브랜드로 통합해 홍보마케팅을 펼치고, 상호 연계성을 강화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6월부터 전 국민 대상 공모를 통해 최종적으로 ‘목포(愛)가을(藝)페스티벌(樂)’로 선정된 통합명칭의 의미는 ‘가을에는(愛) 낭만항구 목포에서 문화예술(藝) 축제(Festival)를 즐기자(樂)’로, 한·중·미 3개 국어 사용으로 국제적 문화도시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포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가을 여행은 낭만항구 목포로’라는 슬로건 아래 8주간 매주 금, 토, 일요일에 걸쳐 다채롭고 흥겨운 무대가 펼쳐질 예정입니다.8월 30일 제9회 목포세계마당페스티벌을 시작으로, 2019 왕년의 목포축제(9.6.~9.8.), 목포문화재야행(9.20.~9.22.), 전국통키타페스티벌(9.27.~9.29.)이 이어지고, 올 가을 낭만항구 목포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2019 목포항구축제(10.3.~10.6.), 생활문화동호인한마당(10.11.~10.13.), 서산동 연희네슈퍼 일원에서 열리는 골목이 춤춘다(10.18.~10.20.), 북항노을축제(10.25.~10.27.) 등  낭만항구 목포는 가을 내내 풍성한 볼거리로 관광객을 맞습니다.가을 문화예술축제 상호 간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고, 목포의 가을 이미지를 더 높여 가을여행은 낭만항구 목포로 올 수 있도록 만들어 해상케이블카와 함께 연계해 상당한 시너지 효과가 기대됩니다. ■목포가 최근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뜨고 있습니다.  =금년 들어 ‘롱 리브 더 킹’과 같은 영화뿐 아니라 각종 교양프로그램, 인기 드라마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목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KBS 6시 내고향, tvN 호텔델루나, MBC 신입사관 구해령)   7월중에도 케이블채널에서 인기 있는 여러 프로그램을 목포에서 촬영했습니다. (tvN 유재석의 유퀴즈 온더 블럭, TV조선 허영만의 백반기행, SBS 이승기의 집사부일체 등)올해 초 미디어마케팅팀을 신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마케팅을 집중 전개한 결과로  보입니다.최근 문체부 한류 관광지 활성화 공모사업에도 선정돼 하반기 중 1억원의 예산으로 촬영지를 활용한 관광지 홍보 등을 계획 중에 있습니다.앞으로 촬영지를 활용한 다양한 관광상품 개발, 미디어마케팅 접목 등 전방위적인 홍보 전략을 통해 도시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고 더 많이 알려서 목포를 서남권관광거점 도시로 만들고자 합니다. ■관광객 유치 위한 대형 숙박시설 대책은?=현재 목포에는 관광호텔 5개소와 가족관광호텔 2개소 등 약 350여개의 숙박시설이 있으나 일반 모텔이 다수여서 가족단위나 학생 등 단체 관광객이 투숙하기에는 시설이 많이 부족한게 사실입니다.200객실 이상 규모의 리조트 유치를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련 업체들과 협의 중이며 지난달 25일 (주)여수예술랜드가 장좌도 일원(292,748㎡)에 1500억원을 투자, 370 객실 및 워터파크, 스카이바이크, 조각공원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춘 대형 복합형 리조트 조성을 내용으로 하는 투자협약을 체결했습니다.앞으로 케이블카가 개통되고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면 수요 및 공급의 원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더 많은 투자가 활발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더불어 기존 시설을 개선해 관광 숙박업소로 전환, Happy Family 지정 및 숙박업소 간판정비(모텔→호텔)  등 관광객 숙박시설 확대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도시재생사업과 문화재도시재생 사업은?=도시재생 뉴딜사업은 2017년 12월 선정된 ‘1897 개항문화거리’ 및 ‘서산동 보리마당’ 2개의 사업이 추진 중입니다.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 조성사업은 당초 계획대로 차질 없이 추진하고 있으며 2018년 8월 원도심 일대는 전국 최초 공간단위 문화재로 등록돼 올해부터 2023년(5개년)까지 500억의 사업비가 투입되어 문화재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이를 활용한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원도심은 목포만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간직한 보물창고로 도시전체가 지붕없는 박물관인 만큼 재생사업을 통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균형발전, 관광자원화, 주민 삶의질을 개선하겠습니다. ■ ‘제1회 섬의 날’ 행사 개최 준비는? =‘만남이 있는 섬, 미래를 여는 섬’을 주제로, 온 국민이 다 같이 즐기는 축제 형태로 구성해서 행사 이름도 ‘제 1회 섬의 날 기념, 대한민국 썸 페스티벌’로 정했습니다. 기념식에는 정부 주요인사, 국회의원 등 1500여 명이 참석하고 축하 이벤트도 선보일 예정이며, 전국 섬 홍보부스(60여개)도 운영하고, 섬 민속경연, 섬 특산품 판매, 섬 문화 체험, 어린이 해양직업체험이나 케이팝콘서트, 멀티미디어 불꽃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입니다.행사장 정비와 각종 안전 시설물 설치, 교통·의료대책 등을 안전하고 성공적인 축제가 되도록 지원하기 위해 부서별 지원업무를 세분해 자체적인 세부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여름 휴가철과 방학이 겹치면서 전국에서 많은 관람객이 찾아올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섬의 날’ 제정은 그동안 낙후와 소외의 대명사처럼 취급됐던 섬의 미래성장 동력으로서의 가치를 인식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이에 따라 섬의 날 기념행사는 섬의 가능성과 중요성 공유 및 인식 제고, 섬은 더이상 고립과 단절의 대명사가 아닌 가능성과 발전의 대상이 될 것임을 천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 기획.연재
    2019-08-05
  • 수은 강항, 일본에 성리학을 가르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끌려가 조선 성리학 전파오는 6월19일 교토 료코쿠대서 국제학술세미나 한국 강항기념사업회, 6월21일까지 현지 방문 2019년 6월 19일 일본 교토 용곡(료코쿠)대학교 세미나실에서 수은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가 열린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9월 1일 방영한 MBC TV 드라마 ‘간양록’과 KBS에서 2002년 3월 6일 방영했던 KBS 역사스페셜-‘임란 포로체험기 간양록, 선비 강항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로 수은 강항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붙잡혀가 참혹한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왜국에 유교를 전파한 업적에 비해 궁색하나마 그렇게 조금씩 알려져 왔다.올해 2019년은 탄신 453주년을 맞이해 일본 에이메현 오즈시 수은강항선생일본연구회(회장 무라까미 쓰네오)에서는 선생의 위령제(慰靈祭)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우리나라에서는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 비교적 활발히 강항문화제와 연계해 활발하게 일본 에이메현 오즈시와 교류 등으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양국의 시군 교류까지 중단되고 말았다. 2001년 3월 6일 2박3일에 걸쳐 영광 향토사 관계자와 강항 선생 연구자 등 16명이 일본 성리학 전파 유적지 답사기행을 다녀왔으며, 2002년 9월 1일 영광 JC와 오즈JC가 일본의 에이메현 오즈시에서 회무교류를 가졌다. 이와 관련한 성과로 같은해 문화관광부 선정 3월의 인물 <수은 강항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들이 영광에서 비중 있게 다뤄져 왔다.또 수은 강항의 ‘간양록’(출판 서해문집 2005.02.28.)을 현암 이을호 선생이 집필했다. 현암의 다산 정약용 연구를 비롯한 실학사상의 연구업적은 지금도 학계에서 독보적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강항을 수면위로 올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이다.이같은 다방면에 걸친 노력과 성과에 힘입어 최근 한일 양국에서 강항 선생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실제 일본 에이메현에서 20년째 거주하고 있는 한국어 교사 강용희(진주강씨 은열공 후손) 선생이 ‘Peace Love in 에이메’회원 자격으로 2018년 6월 무라카미 쓰네오 수은강항선생 일본회장을 찾아가 수은 강항 선생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처음 알고 “그동안 20여 년 동안 일본에서 알게 모르게 숨죽이고 살아온 나날을 이제는 훌훌 털고 대유(大儒)이며 지성(至聖)인 강항 선생의 위령제를 오는 6월 8일(강항 탄신일 음력 1567년 5월 17일)에 준비 중”이라고 전해왔다.강용희씨는 진실된 역사를 알고 1597년 최악의 포로 신분인 수은 강항으로부터 유교를 배운 일본인들에게 이제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일본 내에서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살아가게 된 계기가 마련되었노라며 매우 감격해 하고 있다.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도 일본 성리학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는 수은 강항 선생의 업적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일본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6월 18일부터 6월 21일까지 방일 기간중 국제학술세미나를 비롯 강항기념관 건립에 대한 유물 확보 차원에서 ‘일본 국립 공문서관 내각문고 및 교토 류코큐(용곡)대학교  및 도쿄박물관’을 방문한다. 이에 앞서 수은 강항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수은 강항은 세조 때 명신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의 5대손으로 1567년(명종 22년)에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에서 강극검의 5남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강항 집안은 고조부인 강학손(1455∼1523, 강희맹의 차남)이 영광군으로 귀양와 정착하였다.    강항(姜沆)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였다.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서 글을 읽으면 곧 바로 외워 주변으로부터 신동(神童)이라 소문이 자자했다. 네 살 때 맏형인 저어당(齟齬堂) 해(瀣)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뛰어나게 잘해 소문이 널리 났다.  해(瀣)의 호는 저어당(齟齬堂)으로 율곡 이이의 문하(門下)에서 폭넓은 교류를 통해 학문을 쌓다가 신묘년(선조 24년, 1591년) 신묘사화(辛卯士禍)에 연좌되어 변고(變故)를 당하였다.(선조실록 1591년 8월 13일) 강항은 이미 다섯 살에 벌써 글을 지을 줄 알았다.당시 전라감사 신응시(辛應時)가 이 소문을 듣고 각(脚)자로 명제를 주니, 곧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다리가 만 리를 가지만 그것은 마음이 다리를 시킨 것)이라 지어 신응시 전라감사를 놀라게 하였다.강항이 일곱 살 때에 중국고서를 판매하는 책장수가 불갑면 안맹마을을 지나가면서 어린 소년이 맹자(孟子)책을 읽어보기 위해 다가오자 맹랑하게 느껴 놀려줄 심산으로 이 책을 읽어보게 하고 맹자 1질에 대한 내기를 걸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나절 동안 그 책장수와 강항은 맹자책을 앞에 놓고 씨름을 벌인 일화로 유명하다.  결국 강항(姜沆)이 안맹마을에서 한나절 사이에 이것을 모두 암송(暗誦)하고 ‘이 책은 이미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으니 사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유봉마을로 가버렸다. 그 책장수는 놀랍고 기특하여 그 책을 소년에게 선물로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음으로 마을 어귀의 당산 나무에 매 달아 놓고 갔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후에 이 자리에 맹자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강항(姜沆)의 천재성을 기려왔다. 지금도 그 자리(안맹마을) 부근에 맹자(孟子)정 비가 서있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6월에 강항은 이굉중 · 이용중 · 송약선 등과 함께 창의하여 양곡과 군기를 고경명 의병에 보냈다. 10월에는 영광군수 남궁현이 친상으로 사직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응종 등 영광 선비 55명은 자발적으로 영광군 향토방위에 나섰는데 강항도 집안 친척 강태, 강락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영광군 영광읍 임진수성사에는 이들 55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593년 12월27일 세자 광해군(광해군은 분조 역할을 함)은 전주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문신 11명, 무신 1600 명을 뽑았다. 이 때 강항은 병과(丙科) 5번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27세였다.강항은 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는 형조좌랑이 되었고, 1597년 2월에는 영광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5월말에 강항은 호조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으로 남원성 군량미 운반을 담당했으나 남원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항은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의병 수백명을 모집했지만 왜군이 전라도를 침탈하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9월 14일에 왜적들이 영광군을 온통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자, 강항은 둘째 형 준(濬), 셋째 형 환(渙) 등과 함께 배를 타고 피신했다. 20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우기로 하였는데, 뱃사공이 21일 밤에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려 부친이 탄 배와 헤어지고 말았다. 23일 아침에 강항 일행은 부친을 찾아 영광군 염산면 논잠포로 향했다. 그런데 왜군 수군이 나타나 강항 일가는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강항(姜沆)과 두 형을 비롯한 가족을 포로로 잡은 왜 수군은 부산 근처의 안골포(安骨浦)를 거쳐 대마도로, 그곳에서 일본 침략군의 출발 기지인 큐슈(九州) 서북단의 나고야(名古屋)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큐슈 동북쪽에 가로누운 시코쿠의 나가하마(長浜) 항에 닿았는데 그때가 음력 10월 15일이었다. 나가하마에서 오쓰(大津)에 닿기까지의 15km는 그야말로 죽음의 행로였다. 선상(船上)에서 아흐레를 굶어도 죽지 아니하고 그 쇠잔한 몸으로 나가하마에서 오쓰에 이르기까지 열 발자국에 아홉 번을 쓰러졌다니 생지옥을 거쳐 도깨비굴에 닿은 것이다.오쓰는 강항 일가족을 붙들어온 왜의 장수 도도 다카토라의 영지(領地)다. 오쓰 거리는 강항 가족과 전후하여 붙들려온 1000여 명의 조선족이 즐비했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니 씻을 수 없는 왜놈들의 죄업(罪業)이 눈앞에서 보듯이 ‘간양록’에 적혀있다.강항은 오쓰 억류 생활 9개월에 두 번의 도주를 감행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오쓰의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는 강항 일가족을 오쓰에서 오사카(大阪)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또 후시미(伏見)로 데려갔다. 후시미는 당시 일본의 서울이다. 이곳에서 2년 남짓, 큰 선비 강항(姜沆)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곳에서 일본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것으로 평가되는 학승(學僧)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를 만났기 때문이다. 후지하라 세이카를 일본 성리학의 개조(開祖)로 평가하지만 알고 보면 세이카의 스승이 강항(姜沆)이다. 우리나라 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에는 강항을 일본 성리학의 시조(始祖)로 적어놓고 있다. 개조나 시조는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강항(姜沆)과 세이카와의 관계는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일본의 성리학을 근대학문으로 구축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오쓰에 ‘홍유강항현창비’가 세워진 까닭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후지하라 세이카에게 주자학(朱子學)의 깊은 학리(學理)를 가르쳐준 스승이 강항(姜沆)이며 또 그의 의뢰로 강항(姜沆)과 두 형 그리고 학자 10여 명이 참여해서 사서오경(四書五經) 대자본(大字本)을 정서(淨書)하고 수진본(袖珍本: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소책자)으로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사서(四書)와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 곡례전경(曲禮全經)의 오경(五經)과 소학과 근사록(近思錄), 근사속록, 통서, 정몽(正蒙) 등을 필사(筆寫)했다. 수진본 16종은 현재 일본 왕궁의 국립공문서 관내 내각문고(內閣文庫)에 보전되어 있으며 강항(姜沆)의 서명이 뚜렷이 남아있다.일본에서 근래(1991년, 2007년)에 ‘일본에 유교를 전한 조선인’이라는 주제로 2권의 저서가 간행된 까닭은, 강항(姜沆) 이전에 이미 유교가 전해졌다 하더라도 원문(한문)을 해독하는 극히 한정된 몇 사람의 안중(眼中)에 머물러 있던 유교와 성리학을 강항의 도움으로 후지하라 세이카가 사서오경왜훈본(四書五經倭訓本 : 사서오경을 일본음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든 책)과 주자신주(朱子新注)의 훈점본(訓點本 : 새겨서 읽을 수 있도록 한 책)을 완성함으로써 유교와 성리학 접근을 쉽게 하고 그 문호를 넓혔으니 일본 근대화에 미친 강항(姜沆)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후지하라 세이카는 중국과 조선을 숭모(崇慕)하여 도항(渡航: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넘)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독학(獨學)으로 어렵게 배움의 길을 걷던 참에 조선 사람 유학자 강항(姜沆)을 만남으로써 우리 글로 새겨 읽을 수 있는 왜훈본(倭訓本) 간행이라는 대사업을 완성했으니 두 사람을 개조와 시조라는 동의어(同義語)로 엮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시대가 근대(近代)로 내려오면서 일본의 마을과 고을마다 배움의 집인 데라고야(寺子屋: 우리나라의 서당에 해당)가 서고 근대교육에 대한 열망이 불길처럼 일어남으로써 일본의 근대화가 촉진되었으니 일본 땅에 사상과 학문의 씨앗을 뿌린 강항(姜沆)의 이름이 ‘홍유현창비’로 섰음은 당연하다.단지 강항(姜沆)이 써 남긴 ‘간양록’이 사무치는 원한으로 격렬하게 일본을 매도했으므로 일본인이 읽고 질겁을 할 정도라 일본이 조선 강점 이후로 ‘간양록’을 보이는 대로 거두어서 불에 태워 없앴으니 강항(姜沆)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힌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본은 거의 씨가 말랐으므로 지식인 중에서도 강항을 깊이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랬던 것이 강항의 이름을 일본 전국에 알게 한 결정적인 사단(事端)은 1989년 2월 23일 일본의 NHK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45분짜리 「유자(儒者) 강항과 일본」이라는 프로다. 한국 취재까지 한 이 프로는 일본 전국에 큰 충격을 던진 바 있다. 그 전인 1980년 9월 1일자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 문화면에 「한·일을 이은 유자(儒者) 강항(姜沆)의 유적을 찾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강항(姜沆)재조명의 마중물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계속)  /글= 강대의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사무총장
    • 기획.연재
    2019-05-16
  • 한눈에 보는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https://www.youtube.com/watch?v=Kdhy3jXVKXA
    • 기획.연재
    2019-03-29
  • 미스인터콘티넨탈 코리아 오프닝 x 호남일보
    https://www.youtube.com/watch?v=UBdN_Bz1FN8&t=10s 2018년 미스인터콘티넨탈 코리아와 호남일보가 함께 합니다.
    • 기획.연재
    2019-03-29
  •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모든것
    https://www.youtube.com/watch?v=2ld7Db_9-Xs&t=31s
    • 기획.연재
    2019-03-23
  • 역대 광주시장과 흑역사
    https://www.youtube.com/watch?v=t9do_1JsiuQ&t=7s  
    • 기획.연재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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